English | 한국어
 2013년 05월 01일 | 22:29 IST
 2013년 05월 02일 | 01:59 KST
대사 연설문

마지못한 개척자

2012년 10월 16일

1. 어느 늦은 밤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깬 나에게 외무부의 행정 차관이 통화를 원한다 했다. 그는 '혹시 자고 있었냐'며 아랑곳 하지 않고 이어가길, 나에게 블라디보스톡의 초대 총영사 라는 '도전적인 임무'가 주어졌다고 했다. 나의 본능적인 반응은 "왜 하필 나인가" 였다. 이것이 1992 1, 뉴욕 맨하탄의 21층 고급 아파트에서 행복한 잠에 빠져 있던 나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2. 그 후 몇 달간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며 정신 없이 지나갔다. 뉴욕의 친구들은 우리가 죄를 짓고 시베리아로 추방이 돼 다시는 못 볼 듯 눈물의 작별을 고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9살배기 아들을 심라 근처의  Lawrence 기숙학교에 입학 시킨 후 부인과 6살 난 딸만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뉴델리나 모스크바로부터는 아무런 지침도 받은 것이 없었고 마음 속엔 두려움만 가득했다. 1992 9 9일 맑은 아침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우리를 러시아 주재 교민 전원인 2명 반의 인도인과 (인도 남성 2명과 한 명의 혼혈 유아) 시청 관계자, 몇몇 기자들이 맞아 주었다.  

3. 그 때 받았던 두 가지 질문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첫째는 뉴욕과 블라디보스톡 간에 어떤 차이가 있냐는 것이었다. 태풍이 쓸고 지나간 스러져 가는 시골 건물 같은 블라디보스톡 공항을 둘러 보며 나는 다른 것이 전혀 없다고 말했고, 바로 다음 날 신문에는 나에 대한 호의적인 헤드라인들이 실렸다. 두 번째 질문은 '인도 총영사관 업무가 언제 시작 될 것인가' 였다. 나의 블라디보스톡 도착과 동시에 총영사관이 개관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그 동안 폐쇄되었던 도시 블라디보스톡에 영사관을 차리는 세계 최초의 총영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몇일 후 미국 관리들을 태운 선박이 미국 영사관 개관을 위해 성대하고 화려하게 블라디보스톡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모든 관심이 이미 나에게 쏠렸었고, 나는 이에 대한 미국 동료의 불평을 잠재우는 데 몇 달이 걸렸다.

4. 나는 그 후 닥쳐 올 충격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그곳은 더 이상 내가 기억하는1986년의 러시아가 아니었다. 정돈된 삶, 지휘봉을 휘두르는 민병대, 자신감 넘치는 시민들은 보이지 않았다. 철저한 채식주의 아내를 위한 채소나 과일이며 딸을 위한 영어 학교, 임대 가능한 거처도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었고 마피아들의 지휘 하에 범죄가 만연했다. 도착한지 몇 달 되지도 않아, 동행했던 젊은 인도인 비서의 목이 베이고 그의 아내는 잔혹하게 폭행을 당했다. 바로 자신들의 아파트에서 말이다. 보석이며 모든 귀중품 또한 강탈 당했다. 우리는 그 충격에 빠진 부부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은 악몽과 같았던 기억을 견디며 태연히 남아 있길 택했다. 브라보! 그런데 이야기가 좀 앞서 갔다.

5. 시 정부의 도움으로 시내 유일한 호텔인 블라디보스톡 호텔에 방 몇 개를 얻어 임시 관저 겸 공관으로 사용했다. 적당한 영사관 자리와 거처 마련을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음은 물론이다. 몇 달이 지나, 후에 나의 절친한 친구가 된 Premorsky Krai Libidinits 부지사가 친절하게도 블라디보스톡에서 약 20km 거리의 ‘Sanatornaya’에 공간을 내 주었다. 그 유명한 1974년 포드-브레즈네프 회담 시 건축된 건물로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호숫가의 그곳은 가히 그림 같았다. 그 후 2년간 그곳을 관저로 사용하는 동안 우리의 짐은 여전히 창고에 있었다. 블라디보스톡 정부와 시민들의 배려 덕에 총영사관의 직원들 역시 차차 아파트를 얻어 나갔다.

6. 얼마 후 우리는 기업가 Kostyekov를 소개 받았다. 그는 두터운 인정과 엄청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 후에 나의 친구이자 철학자, 인도자가 되었다. 솔직히 그가 없었다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는 고맙게도 주 청사 근처에 위치한 자신의 건물 1층 한 칸을 내 주어 공관으로 사용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내와 나는 친구, 건물주와 함께 건축가 겸 디자이너로 변해 장소를 개보수 하기 시작했고6주 만에 영사관을 열어 업무를 시작하게 됐다. 이에 우리 자신들도 놀랐으니,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꽤나 기록적인 성과였다.

7. 시베리아의 매서운 추위를 피하게 해 줄 안전하고 따뜻한 방 한 칸짜리 아파트 (이 얼마나 호화로운가) 에서 세 명의 인도인, 그와 비슷한 수의 러시아 직원들과 함께 본격적인 총영사관 업무가 시작 되었다.

8. 나는 주 블라디보스톡 인도총영사관이 유례없는 천 2백만배의 무역 성장 기록을 유지하게 했다. 1년 만에 무()에서 천 2백만 달러라는 직접 무역의 급 성장을 달성 한 것이다. 첫 번째 상거래는 아직도 내 기억에 아로새겨져 있다. 어느 날 아침 한 젊은 러시아 남성이 사전 약속 없이 내 사무실로 찾아 왔다. 햇볕에 그을리고 흉터 진 그의 얼굴을 보니 설명이 필요 없었다. 평생 모은 돈이라며 만 오천 달러 가량의 현금을 내 책상에 내려 놓고는 인도 차() 수입을 도와달라 했다. 우리는 꼴까따(구 캘커타)의 이름난 수출상과 거래를 시도했고 그들은 역시나 100% 선지급을 요구했다. 물건을 받아보기까지 걸린 9주 동안 나는 잠 못 이루는 고통의 밤을 지새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첫 시도의 성공 후, 그 친구의 미소 어린 감사를 받고 나서는 뒤를 돌아 볼 필요가 없었다.

9. 우리는 상업적 유대를 강화하기 시작하며 식료품, 의복, 양모, 의약품, 화장품, 보석류 등 현지에서 수요가 있는 품목들을 확인 해 갔다. 다음 작업은 인도 기업들을 러시아로 유치하는 것이었다. 의욕적으로 관여한 상당 수 인도 기업들의 공이 컸다. GUM(지역 최대 규모 백화점)이 백만 달러에 달하는 제품을 몇몇 인도 수입업자들에게 발주 했을 때, 그 일찍 일어난 새들이 벌레를 잡았다 할 수 있겠다.

10. 몇 개월 안에 우리는 인도로부터 꾸준한 방문객을 맞기 시작했다. 첫 해가 끝나 갈 무렵까지 여섯 개의 인도 기업이 블라디보스톡에 무역사무소를 개소했다. 우리 주블라디보스톡 인도인 커뮤니티는 이제 24배 강력해졌다!

11. 우리는 사회, 공동체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결혼 전 경제학 강사였던 아내는 블라디보스톡 극동주립대학교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은 힌디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 모든 것이 다 라즈 까뿌르(영화 Awara Hun Mera Nam Jokar 등의 감독)와 볼리우드의 공이리라! 아내와 대사관 직원 부인들은 힌디 강의 자원 봉사를 시작했다. 힌디 교재들이 인도로부터 공수되어 왔고 몇 주 만에 5명의 열성적인 학생들이 등록했다.

12. 대외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제 블라디보스톡에는6개의 외국 영사관들이 문을 열었고 영사관들의 커뮤니티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갔다. 주지사 부인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그녀는 다음 해 인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내 아내는 그녀를 설득하여 영사관 부인 클럽의 홍보 대사로 만들었고 그들은 자선활동을 시작했다. Torrent로부터 지원 받은 인도 의약품이 각종 병원과 진료소에 기증 되었으며 소수의 불우한 아동들에게는 의료비를 지원했고 몇몇 학교에는 교구가 공급 되었다.   

13. 그렇다고 블라디보스톡에서의 기억이 오직 일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만의 즐거움이 있었다. 언젠가 내 운전 기사에게 종종 시장에서 보곤 했던 킹크랩에 대해 물었던 생각이 난다. 그는 별안간 양동이를 집어 들더니 말도 없이 사라졌다. 한 시간여 후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온 그의 손에는 양동이 안 바닷물에 떠 다니는 거대한 킹크랩 두 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 두 마리가 단돈 2 달러였다!

14. 러시아어 통역사가 있었지만 의사 소통 문제로 인한 재미있는 해프닝도 많았다. 몸이 좀 좋지 않아 종합 병원에 찾아가 '영어를 구사하는' 아리따운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나에게 '언어를 보여달라' 했다. 이해가 안되 어찌할 바를 모르며 자신을 바라만 보는 내게 혀를 쭉 내민 그녀이제야 이해가 됐다! 러시아어로 'yezik' '언어' '' 모두를 의미 하는 것이었다.

15. 나의 직업적 비약은 1993년 중반,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생산국인 야쿠트 자치 공화국 대통령이 내 방문 요청을 받아 들인 후 일어났다. 나는 시베리아 북부 지방에 걸쳐 있으며 영토 대부분이 영구 동토층(기온이 영하 40도 까지도 떨어진다)인 공화국의 주도 야쿠츠크를 방문한 첫 인도 관리였다. 감사하게도 대통령께서는 매우 인상적인 수집품들이 있는 지하 귀중품 보관실 투어를 제공 해 주셨다. 나는 15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자랑스럽게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나의 방문이 있은 몇 달 후 귀금속 및 보석 수출 진흥협회의 사찰단을 야쿠츠크에 파견했고 공업용 원석 공급 협약을 맺었다. 보석류는 이미 러시아 정부가 De Beers에 공급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 후 러시아는 인도의 다이아몬드상들에게 중요한 고급 원석 공급원으로 떠올랐다.

16.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들이 참 많다. Ronen Sen 대사님과 전설적인 호수 바이칼에서 캠핑을 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아주 오래된 에어로플로트 비행기에 콩나물 시루처럼 끼어 앉아 옴짝달싹 못하며 10시간을 날아갔다. 도시를 떠나 올 때 노보시비르스크 주지사님이 새벽 5시에 마련해 주신 송별 연회를 잊을 수가 없다. 공항의 VIP 라운지에서 Sen 대사님과 나를 위해 보드카와 스테이크를 준비 해 주셨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 이른 시간에 그것들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같은 외교관이었던 Sen 대사님께서는 나의 몫까지 거들어 주셨다. 아무튼, 내가 알기로는 유일하게 러시아어에만 숙취 해소를 위한 술 한잔을 의미하는 단어pakhmilyatsya’ 가 있다. 그 곳에 머문 2년동안 우리는 러시아 극동 지역과 동부 시베리아 여기 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인도 국기를 자랑스레 흔들며, 친구를 만들고, 그 상세한 인상을 인도에 전하면서.

17. 우리는 정확히 2년 후인 1994 9 9, 슬픈 마음을 안고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 부주지사 내외가 친히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주시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비행기가 이륙함에 따라 나는 나를 진정한 외교관으로 만들어 준 그 땅에 작별을 고했다. 마음 속으로는 나에게 이 "도전적 임무"를 준 외교부에 감사를 표하면서.

 

2012 9